지역경제 쇠퇴 불구 발전대책 미흡 한목소리...탈충북론 확산

박달재 터널을 지나 들어선 제천시내는 전역에서 녹지 않은 눈이 도로가에 가득 뭉쳐져 있었다. 높은 산세와 고지대 탓인지 체감온도가 청주보다는 훨씬 낮았다.

제천문화원 3층에 위치한 의림포럼 사무실에서 만난 윤성종 의림포럼 사무처장은 제천특유의 억양으로 충북도의 ‘제천홀대’에 대해 말했다.

▲ 윤성종 의림포럼 사무처장이 제천종합연수타운 백서를 보면서 연수타운 설립당위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우택 지사에게 제천연두순시 오지말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약속한 사항에 대해 책임지지도 못한단 말입니까” “1년만에 거짓말을 한다는게 말이 됩니까”

분명 그는 정우택 지사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제천시내에 건립을 추진해오던 제천종합연수타운 사업을 제천시나 충북도가 하지 않으려고 발을 뺀다는 생각을 해서 나온 말이다.

의림포럼에서 왜 연수타운에 이토록 목을 맬까싶다. 알고 보니 제천의 지역경제가 그만큼 낙후되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1970년대는 인접 강원도의 석탄산업의 효과로 지역경제가 활성화 되었지만 충주댐 건설이후 개발제한과 함께 별다른 지역산업을 육성하지 못했다.

윤 사무처장은 “제천의 성장동력을 만들지 못하는게 가장 큰 고민이다. 이제는 제천이 충북의 3위권 도시라고 말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래서 연수타운이라도 시내에 유치해 활성화를 꾀하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천의 민심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4년부터다. 당시 혁신도시 유치를 위해 시민들이 나섰지만 결국 음성진천으로 입지가 결정되자, 충북도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윤 사무처장은 “제천시민들이 강력하게 요구해서 따낸 혁신도시가 다른 곳으로 간 데 대한 배신감과 허탈함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 해 제천시공무원노조가 공무원 61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제천시의 미래지향에 대한 공무원 의견설문서’에 따르면 ‘충북도가 우리 제천지역 발전에 관심을 갖고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50%가 ‘관심조차 없다’고 응답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응답자의 35.8%가 ‘강원도로 편입하는것이 좋다’고 응답해 ‘충북도에 있는 것이 좋다는 응답(35.4%)보다 많았다. 물론 ’충북도나 강원도나 별차이 없다‘는 응답도 28.8%에 달했다.

이해모 제천문화원 상임이사는 ‘희생론’을 말했다. 그는 “우리는 희생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20년 전만해도 충주와 원주, 제천의 경제력이 비슷했다. 그런데 지금은 제천이 너무 낙후되었는데, 자력으로 할 힘도 없다. 정책적인 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 제천시내에 내걸려 있는 플래카드. 충북도정에서 소외당하고 있다는 제천의 민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중현 제천시기업협의회장(성지라임대표)은 “상공회의소를 만들어 지역경제활성화를 모색하려고 해도 제천만으로는 만들 수 있는 자격있는 기업수가 적다”면서 “단양에 있는 기업과 함께 설립하려고 2년째 노력중인데, 여러 가지 이유로 잘 되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 회장은 이와는 별개로 “제천에는 어른이 없다. 함께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어른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도 제천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천시내에는 지금도 ‘청주.청원만 충북이냐. 배고파서 못살겠다. 충북도는 제천발전대책 제시하라’고 적혀있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제천, 원주.영월은 ‘친구지기’

제천주민들이 ‘강원도로 이도하자’는 주장을 하는데는 역사적인 배경도 한몫을 하고 있다. 제천은 원주, 영월, 이천등과 함께 오랜 생활문화권을 갖고 있으며 행정구역에서 수백년간 원주의 속하지역이었거나 원주, 영월과 같은 행정구역을 같고 있었다는 동일 역사권을 간직하고 있다.

제천은 통일신라의 9주 5소경  체제에서는 5소경중 하나인 북원경(北原京)인 원주 소속이었다. 원주는 983년(고려 성종2)에는 지방행정구역이 12목으로 정비됨에 따라 충주목으로 이속되었고, 제천은 원주 소속이었다. 원주는 995년에는 전국이 10도 12주 절도사로 재개편되면서 중원도(지금의 충북)에 편입되었다. 1010년(현종9)에는 전국을 5도 양계 4도호부 8목으로 정비하면서 충주목에 속했다가 1308년 다시 원주목으로 변경하였다.

제천은 1395년(조선 태조4년)에 충청도의 충주목 소속이 됐다. 영월은 충주목 소속이었다가 1399년(조선 정종1년)에 원주목 소속으로 변경됐으며, 대신 원주목 속현이었던 영춘이 충주목 속현으로 개편되기도 했다.

이어 1895년(고종 32) 원주군이 충주 관찰부로 이속되었으며, 영월군 충주부 영월군으로 포함됐다가 1년 뒤에 다시 강원도 행정구역으로 재편됐다. 반면, 1896(고종 33) 제천이 충북 제천군이 되고 원주군이 충주관찰부에서 다시 강원도로 재편된 이후 양 지역 각각 충청북도와 강원도로 떨어진 원주와 떨어진 것은 불과 110여년에 불과하다.

이렇든 다소 복잡하지만 충북 제천과 강원도 영월, 원주는 1000년이 넘는 동안 행정체제의 개편에 따라 여러차례 같은 행정구역하에 있었으며, 현재의 충북과 강원도 체제를 넘나들었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활뿐만 아니라 역사적 동질성도 갖게 된 것이다.

특히 제천과 원주, 강원도와의 유대감은 역사적인 고통을 함께 나눈 사실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연세대 오영교 교수의 저서 <강원감영연구>에 따르면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자극이 되어 발생한 의병운동이 전국에서 최초로 원주에서 전개됐다. 제천에서 기병한 유인석(1842-1915) 부대에 원주 원씨 세력들이 대거가담한 이후 친일적 개화파 정권에 의해 원주가 충주부 소속으로 밀리게 됐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다. 이후 강원도청 소재지를 춘천에 뺏긴 원주도 그 ‘한’이 깊어 제천과 ‘동병상련’하는 정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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