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수-외판-옷가게 61년, 대성의류 박기철 씨
“오늘 당장 굶어도 일하러 가려면 옷 사 입어야”

토박이 열전(18)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있다. 자식이 부모의 생김새를 빼다 박았을 때 쓰는 말이지만 부모의 성정(性情)이나 직업을 물려받았을 경우에도 같은 표현을 쓴다. 유전자정보가 전달되는 탓도 있겠지만 자라면서 보고 듣는 것 만한 교육이 또 있겠는가. 부모가 비만이면 대개 자녀도 비만이다. 비만유전자의 영향도 있겠지만 ‘식구(食口)’라는 말이 한 집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니 후천적인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장사꾼의 피가 흐른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할 것이다. 장사꾼의 피가 따로 있겠는가. 장사를 하는 부모 곁에서 장사하는 걸 보고 자라서 자식도 상인이 되면 장사꾼의 피가 흐르는 셈이다. 청주 육거리시장에서 ‘대성의류총판’을 운영하는 박기철(1939년생) 씨가 그런 경우다. 그의 장사경력은 무려 60년이 넘었다. 박기철 씨의 고향은 전라남도 영광이다. 선친은 소장수였다. 소를 사고파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것은 물론이고, 까까머리 고등학생 때부터 틈틈이 소장수로 나섰다.

“장사한 거를 어떻게 이루 다 말해. 아버지가 소를 팔아서 나도 교복 입고 소 팔러 다녔으니까. 그때는 전북 이리(현 익산시)에 살았는데 전라남도 해남, 함평, 영산포(나주에 있던 河口)에서 이리까지 소를 끌고 걸어 다녔어. 밤이면 마방에 들러 뜨끈한 쌀뜨물을 소 발등에 뿌려주고, 내 오줌도 일부러 소 발등에 누었거든. 그러면 소들이 피로가 풀려서 더 잘 걸어. 짚신을 삼아서 소한테 신기고….”

전남 영광이 고향이고 전북 이리에서 소를 팔던 박기철 씨는 어떻게 청주로 오게 됐을까? 알고 보니 장사꾼의 피가 흐른 건 박 씨만이 아니었다. 박 씨는 3남4녀 7남매의 맏이인데, 여동생과 남동생도 젊은 나이에 월부장사를 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단다. 40여 년 전의 얘기다.

“동생들이 돌아다니면서 보니 청주가 장사하기 딱 좋은 동네라고 하더라고. ‘청주는 군(郡)들에 둘러싸여 있는 도농도시라서 장사가 잘 되는 곳’이라는 거야. 그래서 온 식구가 다 청주로 이사를 온 거야. 그게 40년이 넘었어. 지금 효성병원 옆에 있는 기와집을 샀지. 당시 효성병원 자리는 미나리꽝이었고. 그때부터 여동생은 육거리시장에서 ‘소망그릇’이라는 가게를 차렸고, 남동생은 ‘시장기물’을 했으니까 둘 다 여기서만 40년이 넘었어. 나만 서울에서 장사를 했어. 내가 결혼을 좀 일찍 해서 서울에서 자리를 잡았으니까.”

결국 7남매 중에 목사가 된 남동생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장사를 하며 먹고 살았단다.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번듯한 가게를 차린 건 아니었다. 지금은 고양시 삼송이라고 부르는 곳에 근거지를 두고 전국으로 월부장사를 다녔단다. ‘월부장사’란 신용카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에 견본품을 들고 다니며 물건을 팔고 짧게는 서너 달, 길게는 6개월 이상 나누어 돈을 받는 ‘외판(外販)’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소규모 가전제품에서 그릇까지 다양한 품목들이 월부장사로 거래됐다. 판매와 배송, 수금이 모두 월부장사에 의해 이뤄졌다.

“그때야 솥단지 하나도 덜컥 살 돈이 없어서 다 할부로 샀지. 마오병(보온병), 다리미, 오븐 같은 거. 다 견본 가지고 다니면서 팔고 물건도 가져다주고 수금도 하러 다녔어. 전국에 안 가본 데가 없으니까. 강원도나 이런 데로 멀리 가면 열차화물로 물건이 와. 달방 쓰는 여관에 물건을 쌓아놓고 돌아다니는 거지. 멀리 장사를 나가면 매달 수금이 어려우니까 일시불 조건을 걸어서 물건을 싸게 팔아. 아니면 송금을 받든지 다 방법이 있지. 그러니까 장사꾼이라고 하는 거야.”

월부금을 떼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받을 것은 다 받았단다. 그릇을 잔뜩 산 뒤 몰래 이사 가버린 이를 길에서 만났을 때는 ‘옷이라도 벗어 달라’고 매달린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그때가 오히려 ‘신용사회’였다는데, 근거는 무엇일까?

“웬만한 집에는 집전화도 없던 시절이었잖아. 그래도 다 외상을 줬어. 그때 아줌마들은 다 순진해서 일부러 떼어먹을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모르는 사람한테 외상 주면 근근이 뜯어 갚고 나서 또 사고, 그렇게 거래가 유지되는 거였어. 그런데 지금은 반대야. 외상을 주면 발길을 끊어. 그래서 이제는 아는 사람한테도 외상은 안 줘.”

1990년 6월, 박기철 씨는 그렇게 전국을 돌며 장사를 하다가 동생들이 먼저 터를 잡은 육거리시장으로 들어왔다. 그때 차린 가게가 대성의류다. 안 해 본 장사가 없는 것 같지만 60년 세월 중에 40년은 옷장사를 했단다. 누구든 한 번 배운 장사를 버리기 어렵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더불어 장사철학에 대해서도 역설했다.

“장사에서 중요한 세 가지는 ‘장소’와 ‘구색’, ‘인기’야. 우암산에 올라가서 옷을 팔면 팔리겠어? 우선은 목이 중요하지. 손님의 구미에 맞게 구색을 맞춰야 하고. 지금도 한 달에 서너 번은 서울에 올라가. 물건은 전화로 주문해도 되지만 유행을 알아야 구색을 맞추니까.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세 번째 인기야. 장사꾼은 손님의 비위를 맞춰야하거든. 나이 든 여자 손님에게 ‘여전하시네요’하고 말해주면 싫어하는 사람 하나 없어. 그리고 옷이 마음에 안 든다면 상표를 뗐어도 바꿔주거나 환불해 줘. 내가 옷을 팔았지, 상표를 판 건 아니잖아.”

여성복, 아동복 안 팔아본 옷이 없는데 10여 년 전부터는 남성용 작업복만 판다. 여성복, 아동복은 메이커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남성복 중에서도 작업복만 취급하는 이유가 있다.

“장사를 하면서 터득한 지혜야. 오늘 먹을 게 없어도 내일 일하러 나가야 하니까 작업복은 사거든. 지금까지 경기를 타 본 적이 없어. 그리고 싸게 팔아야지. 여기 솜 든 바지도 만원 짜리가 최고급이고, 파카도 3만원이면 좋은 걸 살 수 있어.”

육거리시장에서 장사의 신(神)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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