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추억이 그리워 찾는 가게…내덕분식 이수남 씨
담배공장 폐창 이전 새벽 4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토박이 열전(17)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도넛이라고 쓰고 ‘도너츠’ 또는 ‘도너스’라고 읽는다. 음식의 맛을 직접 탐색하는 것은 세치 혀지만 그 맛을 종합해서 정리하는 것은 뇌다. 사실 혀끝에 닿은 맛이 전부는 아니다. 눈으로 먼저 먹고 코는 냄새를 음미(吟味)한다. 이 모든 감각신호가 뇌로 모여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때로는 ‘추억’이 맛을 결정한다. 누군가에게는 도너츠나 도너스를 먹는 것이 추억을 베어 무는 것이다.

남학생들의 짧게 깎은 머리를 스포츠머리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귀밑까지만 기를 수 있는 여학생들의 머리는 단발머리라고 불렀다. 모든 학교가 거의 똑같은 교복을 입었으니 모표나 배지로 학교를 구분했다. 도너츠나 도너스는 그때 먹던 추억의 먹을거리다. 요즘 아이들은 도넛을 먹는다.

도넛(doughnut)은 밀가루에 베이킹파우더, 설탕, 달걀 따위를 섞어서 반죽한 뒤 경단이나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기름에 튀긴 음식을 말한다. 대한민국의 도넛시장은 미국회사인 D사와 K사, M사가 1~3위를 점령하고 있다. 이들 회사의 도넛은 시럽을 입혀 윤기가 나고 초코나 크림, 과일 맛을 덧입힌 것들이다. 이에 반해 그 옛날 제과점이나 분식집, 빵집에서 먹던 도너츠와 도너스는 겉에 설탕을 묻히는 것 외에 어떤 치장도 하지 않았다. 작은 빵집에서 옆 자리에 앉은 이성(異性)을 힐끔거리며 먹던 그 다디단 맛은 멋이고 자유였다.

내덕분식은 1980년 무렵에 문을 연 도넛가게다. 내덕칠거리, 옛 연초제조창 맞은 편 이면도로에 있다. 한때는 만두나 칼국수 같은 분식도 팔았다는데 지금은 찹쌀도너츠와 팔도너츠, 꽈배기 딱 세 가지만 판다. 외면 유리에는 도너스라고 써놓았고 가격표에는 도너츠라고 써있다. 쥔장 이수남(1945년생) 씨와 부인 손정오(1952년생) 씨가 함께 장사를 했는데, 10년 전부터 부인은 가게에 나오지 않는다. 힘에 부칠 만큼 고되게 살아온 탓이다. 또 그만큼 장사가 잘 되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노는 게 일하는 거보다 더 힘들어서’ 가게 문을 연단다. 이수남 씨는 충남 온양사람이다.

“나는 부모한테 한 푼도 물려받은 게 없어. 1원짜리 하나부터 내가 벌기 시작한 거야. 내가 돈을 벌어야 했던 1960년대는 암흑세계였거든. 대한민국에 실업자가 넘쳐나고 일할 데도 없고. 온양에는 온천이 있으니까 취직할 데라고는 맨 여관 밖에 없는데 그건 싫었고, 용접을 배워서 현대중공업에 취직했는데 그 것도 못하겠더라고. 스물아홉 살에 결혼을 했는데, 그때 처제가 청주에 살고 있었어. 처제가 청주로 오라고 해서 왔던 거지. 내가 충남사람이니까 대전으로 갈까도 생각했었는데….”

길 건너에서 시작해서 한 2년 장사를 하다가 현재 자리로 옮겨서 33년이 흘렀단다.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달라진 것은 문을 닫는 시간이 빨러졌고 휴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연초제조창이 문을 닫기 전까지만 해도 새벽 1시까지 장사하는 날도 많았다. 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후 7시30분이면 문을 닫는다. 도너츠는 새벽에 한 번 만들고 오후에 한 번 더 만드는데 폐점시간 전에 떨어지는 날도 있단다.

연중무휴였던 것은 옛말이고 이제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다. 아내가 집으로 들어간 대신에 아주머니 한 명을 고용했는데, 종업원의 연령도 일흔일곱 살이다. 주인장도, 종업원도 하루 쉬어서는 피곤이 풀리지 않아서 이틀을 논다고 했다. 평생 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제빵 기술은 어깨너머로 배웠단다.

“가르쳐 주기는 누가 가르쳐줘. 내가 배웠지. 이웃사람이 도너츠 장사를 했거든. 그 사람 찾아가서 어깨너머로 배운 거야. 그러니까 내가 발전이 없잖아. 다른 거는 만들 줄 몰라. 계속 이것만 만드는 거지.”

달리 말하면 찹쌀도너츠와 팥도너츠, 꽈배기에만 집중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집 도너츠가 단지 추억만을 파는 것은 아닌 것이 손님 층이 그야말로 남녀노소다. 취재를 위해 찾아간 시간은 오후 여섯 시가 가까워서였다. 양은쟁반 위에 70~80여 개의 꽈배기와 찹쌀도너츠가 남아있었다. 팔다 남은 도너츠는 어떻게 처리할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쉴 새 없이 손님들이 가게 문을 열었다.

가격은 공히 500원인데, 대개 3000원이나 5000원 어치씩 골라 담았다. 찹쌀도너츠와 꽈배기를 사가는 젊은 여성은 ‘우리 애가 여기 도너츠만 먹는다’고 했다. 도너츠가 남는 걸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남지도 않으려니와 팔고 남는 것은 폐점 후 경로당으로 간단다. 찹쌀은 하루만 지나도 굳어서 식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을 놓을 수 없어서 문을 연다’는 말은 엄살이었다. 지켜보기에도 장사가 쏠쏠했다. ‘하루에 몇 개 정도를 파냐’고 물었더니 그저 웃기만 한다. 하루 매출을 500으로 나누면 금방 답이 나올 텐데도 말이다. 마실 온 단골은 ‘도너츠장사가 의과대학 나온 의사보다 낫다’고 농을 던졌다. 쥔장은 또 말없이 웃었다.

“어쨌든 오래 장사를 하다 보니 재미있는 일도 많아. 그 옛날 코흘리개들이 다시 찾아오는데 나는 변한 걸 못 알아봐도 ‘아저씨 저예요’하거든. 자식들 데리고 오는 사람들도 있고. 요 옆에 농협 아가씨들 중에 단골이 많았는데 그중에 한 명이 와서는 ‘아저씨 지금도 하네요’하며 신기해하는 거야. 그러더니 이제는 쉰은 된 그때 아가씨들이 소식 듣고 줄줄이 찾아오더라고.”

해질녘, 허름한 도너츠 가게의 일상도 함께 저물어 간다. 일곱 평짜리 가게의 절반은 주방이고 탁자는 달랑 한 개다. 하지만 손님들을 위한 자리는 아닌 것 같다. 어둑한 점포 안에서 떨이를 기다리는 도너츠들을 비추는 백열등 불빛이 따뜻하다. 지금은 안온하지만 뜨겁게 흘러갔던 시간이 있다.

“돈 버는데 쉬운 게 어딨어? 손님 많을 때야 손님 받으려 해도 자리가 없어서 못 받았지. 저 계단으로 올라가면 다락이야. 일어서면 천장에 키가 딱 닿는. 한 5년은 저 위에서 살았어. 아들딸 키우면서. 저기 사람이 살 수 있냐고? 저 다락에서 한동안 불고기 장사를 한 사람도 있었는데 뭘. 우리 가게랑 같은 문을 쓰면서.”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