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감자꽃’ 시인 권태응, 독립유공자 선정 불구 기념사업 ‘무심’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28)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 권태응 시인. 일본 스가모 형무소에서 출감하여 귀국한 직후의 모습.

충주시 누리집 정보에 따르면 충주시의 꽃은 국화입니다. 하지만 외지인과 충주시민을 통틀어도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터입니다. 관청에서 이렇다 할 당위성 없이 그저 그런 의미를 덧칠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 주민들에게 가 닿을 리 없는 까닭입니다. 당신도 아는 것처럼, 변별력 없이 획일화 된 자치단체 상징물은 씁쓸한 웃음거리가 된 지 오래입니다. 전국 자치단체의 반 이상이 개나리와 철쭉, 은행나무와 소나무, 까치와 비둘기를 상징물로 삼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지요. 그런 와중에, 권태응의 동시 <감자꽃>이 노래로 작곡되어 불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민들이나 외지인들에게 충주를 대표하는 꽃으로 감자꽃이 우선 꼽히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요?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일제 강점기에 쓰인 이 짤막한 시 <감자꽃>의 해석에는 이견이 없지 않으나, 조선 사람들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려고 했던 이른바 창씨개명에 반항하는 시이며, 아무리 내선일체를 주장해도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은 그 생김새와 뿌리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는 노래라는 해석이 두루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새기어도 자연의 이치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는 건 두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 탄금대 공원에 건립돼 있는 권태응 시비.

일제 저항 형무소서 폐결핵 발병

권태응은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인 1918년 충주 ‘옻갓’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 칠금동이라 불리는 이곳은 안동 권씨 집성촌이었다죠. 충주 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를 다니던 소년 시절 권태응은 글쓰기, 특히 일기를 잘 쓰는 아이였다고 합니다. 1932년 15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1937년 졸업앨범 사진에 ‘再建’이란 제목을 붙인 일, 또 졸업식 날 친일파 집안이면서 늘 거들먹거리고 다닌 동료를 구타한 사건으로 인해 일제로부터 ‘요시찰 인물’이란 낙인이 찍힌 채 고보를 졸업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정경학과에 입학한 권태응은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독서회’ 모임을 조직했습니다. 이름은 독서회였지만 실상은 빼앗긴 나라를 걱정하며 반일사상을 토론하는 자리였죠. 여전히 일본 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아오던 1938년 여름, 권태응은 방학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짐을 싸다가 체포되었습니다. 독서회를 만들어 민족주의를 조장했다는 혐의였습니다.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된 지 1년 만에 권태응은 당시로서는 중병인 폐결핵에 걸려 출감했습니다.

귀국하여 인천 적십자 요양소에서 3년간의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권태응은 어린이를 위한 동요 창작에 전념했습니다. 병세가 호전되어 충주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야학을 열어 가난한 시골 아이들의 스승을 자처했습니다. 그는 당시 학생들에게 “부지런히 배워서 일제로부터 벗어나도록 하자”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 칠금동 권태응 시인의 생가터. 주민들이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밥 얻으러 온 사람/가엾은 사람./다 같이 우리 동포/조선 사람.//등에 업힌 그 아기/몹시 춥겠네./뜨순 국에 밥 한술/먹고 가시오.”(<밥 얻으러 온 사람> 전문) “북쪽 동무들아/어찌 지내니?/겨울도 한 발 먼저/찾아왔겠지.//먹고 입는 걱정들은/하지 않니?/즐겁게 공부하고/잘들 노니?//너희들도 우리가/궁금할 테지./삼팔선 그놈 땜에/갑갑하구나.”(<북쪽 동무들> 전문)― 1945년 광복과 함께 이내 분단이 현실화되자 권태응은 이처럼 민족의 시련을 가슴아파하는 동시를 썼습니다. 염려했던 대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고, 권태응은 1951년 6·25 전쟁 중에 지병이 악화되어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권태응의 동시는 기존 동시와는 사뭇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현란한 수사나 이미지 대신 소박하고 건강한 농촌의 서정과 아이들의 정서를 그대로 노래하는, 이를테면 리얼리즘 동시의 새 지평을 연 것입니다. “혼자서 떠 헤매는/고추잠자리,/어디서 서리 찬 밤/ 잠을 잤느냐?//빨갛게 익어 버린/구기자 열매,/한 개만 따먹고서/동무 찾아라.” ― 권태응의 동시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려운 말을 하나도 쓰지 않고 아이들 말로 ‘노래한’ 작품에 공감하며, 그 자체로 아름다운 노랫말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습니다. 실제로 그의 많은 동시가 노래로 만들어져 아이들에게 불리고 있으니,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예정된 일이라고 해야 옳을 듯합니다.

▲ 칠금동 주민들이 마을에 건립한 시비. 동시 <재미있는 집 이름>이 새겨져 있다.

권태응 문학제 20년 생가터 방치

1999년 권태응의 장남 영함(미국 뉴욕 거주) 씨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부친의 미발표 동시집 《산골마을》을, 또 2006년에는 단편소설 <새살림>, <양반머슴>, <別離>를 공개하여 권태응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또 2005년 광복절을 맞아 권태응이 독립유공자로서 대통령 표창을 받음으로써 문학계를 넘어 권태응에 대한 관심을 모으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 모두가 1997년부터 권태응 문학제를 이어온 후배 작가들이 백방으로 노력한 결실이었습니다. 문학제는 20년을 거치는 동안 ‘권태응 문학잔치’란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 일환으로 해마다 여름에 열리는 ‘어린이 시인학교’는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캠프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충주시는 강 건너 불구경입니다. 여타의 자치단체들이 대개, 명망 있는 인물이라면 실낱같은 연고라도 아전인수 격으로 끌어다 붙여서 자기 지역의 콘텐츠로 정착시키려고 애쓰는 것과는 아주 딴판입니다. 어떤 곳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목불인견이더니, 이곳은 무심해도 너무 무심해서 할 말이 마땅찮을 지경입니다.

문학관 건립은 아예 꿈도 못 꿀 형편이고, 행사예산 지원도 어떻게든 모면(?)해 보려고 핑계를 앞세우기 일쑤입니다. 밭으로 남아 있는 생가 터에는 시인을 기리는 작가들과 어린이 답사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그나마도 법무부가 청주보호관찰소 충주지소 신축부지로 매입해 놓은 터라 앞날을 기약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하긴 이 사회에서 시가 무슨 소용이며 시인이 무슨 자리가 있겠습니까. 문학이 밥 먹여주느냐는 물음 앞에서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대학엘 가느라고 다투고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취업을 하느라고 다투고, 취직한 사람들은 살아남으려고 다투는 사회. 사람이 모두 경제성장을 위한 소모품으로 전락한 마당에 100년 전에 태어난 시인의 생가 터가 무슨 대수겠습니까. 이런 자조(自嘲)를 앞세우고 돌아오는 나를, 당신이 좀 꾸짖어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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