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출세의 대명사’ vs 최귀동 ‘사랑의 상징’ … 음성서 만난 엇갈린 가치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24)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음성을 바라고 36번 도로에 오릅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증평 도안면을 지나면 음성군 영역인데, 왜 그런지 행치재를 넘어야 비로소 음성 땅으로 들어가는 기분입니다. 한남금북정맥이 지나가는 고개라서 그렇지 싶은데, 달리 부르는 이름 한금령의 ‘한금’도 ‘한남금북’의 줄임말일 것입니다. 한강수계의 남단이며 금강수계의 북단, 북쪽으로 달리던 한남금북정맥이 서쪽으로 방향을 트는 지점이니까 진정 남북의 경계를 이룬다는 느낌을 줍니다.

▲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 행치마을에 건립된 반기문기념관. 입구에 <세계를 품으시는 태산이여>란 제목의 축시를 새긴 비가 서 있다.

고갯마루에 수백 년 된 살구나무가 서 있어 행치(杏峙)란 이름을 얻었다고, 고개 아래 행치마을 유래비에는 씌어 있습니다. ‘치’와 ‘재’는 같은 뜻이니 중첩된 말 아니냐고 당신은 물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들이 대개 그렇게 부르니 그렇게 불러야 자연스럽습니다. 관습이라고 하던가요?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인정하고 습관화 해온 것들에는 옳고 그름의 잣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힘이 내재돼 있습니다.

살구나무는 도로 공사로 없어졌으니 유명무실해졌고, 오늘날 행치마을을 지탱하는 이름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입니다. 반 총장이 태어난 마을이라 하여 음성군에서 벌써부터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짓는 등 호재(好材)를 선점하려는 노력을 펼쳐 왔습니다. 출생으로써 어떤 인물의 소유권을 점유하는, 이른바 속지주의 또한 우리 사회의 관습이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반 총장이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이 충주로 이사해 살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번에는 충주시에서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으니, 양 자치단체가 다투어 돈을 쓰는 꼴이 됐습니다.

반 총장 취임축하 시비 씁쓸

반 총장이 최근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마당에 자치단체장으로서야 사활을 걸어볼 만한 일이겠으나 세금 내는 주민들은 무슨 입맛으로 그 목불인견의 풍경을 견딜까요. 인물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고 업적에 대한 평가도 저마다 다를 수 있으니 내가 시비(是非)를 논할 바 아닙니다. 다만 총장 취임을 축하하는 시비(詩碑) 앞에서는 글공부 한 자로서 자괴감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것도 글이며 문학인가, 시의 효용에 이런 치장과 들러리도 포함된다고 배웠던가 물어봅니다.

문중의 인물을 치켜세우는 일이라도 염치가 있어야 하고, 비석이라는 게 흔한 장식물이 되어서 돈을 들이면 누구나 세울 수 있는 시절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인심을 살피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은 단지 나만의 착각일까요? 어떤 벼슬에 오르는 것에 필요 이상으로 환호하는 경향도 관습이라면 하루빨리 벗어버려야 할 관습이란 생각을 하며 길을 재촉합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 그 성취보다 그 지위가 보장하는 권한으로써 어떤 일을 했는지가 훨씬 중요하며, 그것이야말로 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상념이 한참 뒤를 따라옵니다.

▲ 사랑과 봉사의 대명사가 된 꽃동네 전경. 1000여 명의 수도자·봉사자·직원들이 4000여 명의 요양자를 돌보고 있다.

음성의 옛 이름은 설성(雪城)입니다. 음성 읍내의 설성공원이나 매년 10월에 열리는 설성문화제 따위에 그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미호천과 달천의 지류들이 만든 기름진 평야와 풍부한 물을 바탕으로 예부터 양질의 농산물을 많이 생산하는 농촌이었고, 한때는 무극금광을 비롯한 37개의 광구가 호황을 누렸던 광업지역이었으나 다 옛이야기가 됐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급격한 공업화가 진행돼 금왕산업단지를 비롯해 많은 농공단지가 조성되었고, 잇단 지방산업단지 조성으로 중부권의 핵심 공업도시로 변모해 가고 있습니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땅값이 오르고 돈이 도는 것을 기대하는 주민들이 환영 일색이니 농지가 공장부지로 바뀌는 흐름을 되돌리긴 어려울 것입니다.

맹동면 인곡리에 위치한 ‘꽃동네’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회복지시설로 꼽힙니다. 1976년 11월에 개설한 이래 노인요양원, 알코올중독요양원, 결핵요양원, 심신장애인요양원 등 부대시설을 잇달아 증설했습니다. 전국에서 약 80만 명의 후원회원이 재정을 후원하고 있으며, 수도자·봉사자·직원 1000여 명이 약 4000여 명의 요양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이렇듯 무의탁 요양자들의 낙원인 꽃동네는 설립자 오웅진 신부와 최귀동 할아버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부터 비롯됐습니다.

최씨 기부 120만원 꽃동네 초석

최 씨는 음성군 금왕읍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제 징용에 끌려갔다가 돌아와 보니 집안이 이미 풍비박산이 난 뒤였죠. 병든 몸으로 무극천 다리 밑에 거적을 치고 사는 걸인이 된 이후 40여 년 동안 밥을 얻어다가 자기보다 못한 걸인들을 보살피며 살았다고 합니다. 오 신부는 최 씨의 이런 삶을 목격하고 깨달음을 얻어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 설파하며 걸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시설 ‘사랑의 집’을 개설한 것이 꽃동네의 시초가 되었고, 이후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힘조차 없는’ 사람들의 안식처로 자리 잡았습니다.

▲ 꽃동네 입구에 서 있는 최귀동 할아버지 동상. 걸인으로서 밥을 얻어다가 자신보다 못한 이웃들을 보살피는 거룩한 삶이 꽃동네 탄생의 모태가 되었다.

‘작은 예수’라는 애칭을 들었던 최 씨는 1986년 한국가톨릭대상 사랑부문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최씨는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라”며 상금 120만원을 내놓아 12억 원이 들어가는 노인요양원 건립의 씨앗을 마련하기도 했는데, 4년 후 고혈압으로 쓰러져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에서 거룩한 생애를 마쳤습니다. 음성군은 고 최귀동씨의 숭고한 박애정신을 기리고 나눔과 베풂으로 공동체의 두레정신을 되살려 현대인들에게 사랑의 경종을 울려준다는 취지로 매년 품바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품바’란 각설이타령의 후렴구에 사용되어 장단 구실을 하는 의성어로 전해왔으나 현재는 각설이나 걸인의 대명사로 일반화 되었습니다.

최귀동씨의 자리는 다리 밑이었고, 그것은 속칭 ‘세계 대통령’이라 불리는 유엔사무총장이란 자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으며 사회적 지위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최 씨를 성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우러르는 반면 반 총장에 대해서는 ‘출세의 대명사’ 정도로 여기며 부러워하는(?) 정도입니다. 역시 ‘자리’보다는 ‘행위’로써 사람의 무게를 재는 저울로 삼아야 마땅하다고 중얼거린다면, 당신은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 말라며 허탈한 웃음을 웃으려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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