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고전 자리매김 불구, 작가 홍명희는 문학제 조차 거부당해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22)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 제월리 제월대 광장에 건립된 홍명희 문학비. 소설 《임꺽정》의 서두 부분이 새겨져 있다. 1998년 전국 문인들의 성금으로 건립됐으며, 안규철의 설계와 신영복의 글씨로 이루어졌다.

당신도 한때 푹 빠져 읽었던 《임꺽정》은 1928년부터 1940년에 걸쳐 <조선일보>와 <조광>에 연재된 대하 역사소설입니다. 장길산·홍길동과 더불어 조선 3대 도적으로 꼽히는 큰 도둑 임꺽정을 내세워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총체적으로 담아낸 걸작으로서 홍명희가 신간회 관계로 검거된 뒤에도 유치장에서 집필이 허용되었을 만큼 인기와 화제가 만발했던 소설입니다. 좌우로 갈린 문단에서도 《임꺽정》에 대해서만큼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카프의 대표격 문인이었던 한설야는 “천 권의 어학서를 읽는 것보다 《임꺽정》을 읽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니, 문필을 업하는 사람이고 아니하는 사람을 막론하고 이것은 꼭 읽어야 하리라”라고 상찬했고, 이효석 역시 “한 시대 생활의 세밀한 기록이요 민속적 재료의 집대성이요, 조선 어휘의 일대 어해(語海)”라고 평가했습니다.

좌우 통합 강조, 양측 이름 차용해

대하소설 《임꺽정》은 실재했던 도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인데, 중요한 것은 조선의 일반적인 풍속을 그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임꺽정》은 ‘말(언어)로 그린 풍속화’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홍명희도 소설 첫머리에서 ‘조선 정조(情調)’를 강조했거니와 그것은 일제의 정책으로 붕괴되어 가는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소설로나마 지키려고 했던 의지로 읽힙니다. 그러니까 《임꺽정》은 언어·역사·지리는 물론 건축·음식·의복·활 따위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별로 공부 거리를 제공해 주는 셈이니, 그야말로 조선의 풍속사에 있어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 할 만합니다.

가슴 아픈 일은 홍명희가 그의 고향 괴산에서 ‘용서받지 못할 자’로 배척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괴산군이 임꺽정을 괴산 지역 농산물을 홍보하는 캐릭터로 사용한 건 오래된 일이고, 심지어 홍명희 생가 앞을 ‘임꺽정로’라고 명명하면서도 임꺽정을 살려낸 작가는 외면하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거죠. 문학비를 세울 때는 괴산 지역 보훈단체의 강력한 항의로 비문을 뜯어내고 다시 붙이는 수모를 감수해야 했고, 생가보전 운동이 벌어졌을 때에도 이들의 반발로 괴산군과 충청북도가 가옥과 토지를 매입하는 데 적잖은 진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보훈단체가 홍명희를 적대시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홍명희가 북에서 부수상을 지냈다는 점을 들어 전쟁을 일으킨 책임이 있으며, 전쟁으로 가족을 잃었거나 부상을 당해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온 당사자들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1945년 8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이른바 해방공간의 한반도는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광복의 기쁨에 취한 민중들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에 발을 들인 정치적 실력자들은 조국의 분단과 통일을 저울질하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저마다 ‘올인’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혼탁한 정치판에서 좌·우익 진영은 홍명희를 서로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하고 저마다 무슨 조직을 창설할 때마다 홍명희라는 이름을 앞세웠습니다. 오죽하면 그가 <성명>이라는 제목 아래 성명을 발표해 당리당략에 따라 개인의 명망을 제멋대로 이용해 먹는 실태를 개탄하고 공식적으로 항의의 뜻을 표현하기도 했을까요. 이러한 소동은 홍명희가 양심적인 민족지도자로서 정치노선을 막론하고 두루 중망을 얻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 제월리 옛집. 홍명희 가족들이 동부리 고가를 팔고 이사해 살았던 집이다. 한때 이 집이 홍명희의 생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통일정부 수립 의지 북 잔류 선택

그는 대중적인 정치가라기보다 학자로서의 면모가 강했고, 《임꺽정》을 써서 화제가 됐지만 스스로 작가를 자처했던 적도 없습니다. 홍명희는 좌·우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중간노선을 표방한 민주독립당을 창당하고 민족의 통일과 자주독립을 위한 노력에 골몰하였습니다. 미국의 지지 아래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논의가 본격화되자 이에 강력 반대하며 “미·소 양국의 충돌로 우리 부자 형제의 살육전이 먼저 일어날 것”(논설 ‘통일이냐 분열이냐’)이라며 민족사적 기로에 서있는 시국에 경각심을 촉구했습니다. 결국 한반도의 정세가 분단 쪽으로 기울자 절체절명의 위기를 실감하고 남북연석회의를 추진하고 한국독립당의 김구 등과 더불어 남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민주독립당 대표로 평양에 갔다가 그곳에 남았습니다.

홍명희가 북에 잔류하기로 결정한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당시 정국으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그 시점에서 북측 실권자들이 남측과 달리 통일전선 의지가 분명하다는 판단 아래 통일정부 수립에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듯하고, 무엇보다 신변의 위협을 염두에 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여운형이 암살당했고, 회담을 마치고 남으로 돌아왔던 김구마저 이듬해 곧 암살된 사실이 이런 사정을 뒷받침해 줍니다.

북에 남은 홍명희는 박헌영·김책과 함께 부수상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1인 절대권력 체제에서 다른 자리는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명망으로 뜻밖에 중용되긴 했으나 실제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놀라운 통찰력으로 ‘분단이 현실화 될 경우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을 경고하며 이를 막아보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던 홍명희에게 ‘전범’이란 멍에는 참으로 가혹한 것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홍명희는 여전히 ‘분단의 상처’요 ‘이념의 상처’로 남아 아날로그의 기억회로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나는 못 가나 부다. 너나 가 봐라.”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곧 유언이 되었던 홍명희. 그러나 어떤 설명도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고향 사람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지 못한다는 현실 앞에서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공유하고 치유하지 못한 개인의 상처는 한(恨)이 되어서 집집마다 양식(糧食) 자루처럼 웅크리고 있습니다.

전쟁은 국가 간에 일어나는 극단적인 외교방식인데 그 정신적 피해는 오롯이 뭇 백성들이 감당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충분히 위로받아 마땅합니다. 전쟁의 불씨를 없애기 위해 애썼던 사람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는 것이 참 속절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위로가 된다면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홍명희의 운명이라기보다 분단의 길을 걸었던 우리 민족이 끝내 감당해야 할 숙명이라는 당신의 말이 가슴을 칩니다. 부디 민족 지도자로서 좌·우의 통합을 강조했던 홍명희가 남과 북을 잇는 ‘민족 화합의 가교’로 주목받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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